한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편의상 B라고 부르겠습니다.
B는 유복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능력있는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아래서 걱정없이 자란 듯, 훤칠한 키와 뾰얀 피부, 수려한 외모는 또래 여학생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B에게는 남모를 '과거'가 있습니다. 반항기 충만한 10대 중반, 그는 자신의 집 근처의 강남역 타워레코드(지금은 사라진) 앞에서 친구들과 매일 모임을 갖고, 금지된 음주파티를 즐겼으며 결국 패싸움에 휘말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퇴학 위기를 맞은 거죠.
놀라운 것은 반항을 일삼던 그가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다투던 수재였다는 사실입니다. B의 능력을 안타깝게 여긴 담임 선생님은 수소문 끝에 그를 받아줄 학교를 찾게 되고, 그는 곧 전학을 앞두게 됐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법한 예쁜 외모를 가진 그녀는 그의 모임에 종종 나온 동갑내기였죠. 전학가기 며칠 전, B는 그 여학생에게 고백합니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답하고요.
전학날 아침, 대문을 나서는데 우편함에 무언가가 꽂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의 사진입니다. 사진을 받아 든 B는 기쁜 마음에 사진을 얼른 품안에 넣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전학을 가게 됐지만 그녀의 응원이라도 받은 양 기분이 날아갈 듯 신납니다.
때는 봄 햇살이 찬란한 5월 28일, 한강을 지나면서 그의 기분은 한껏 도취됩니다. 이른 아침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분들의 빗질소리까지 경쾌하게 들립니다. 그녀를 매일 볼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사진을 남겨둔 것은 긍정적인 의미가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B가 학교에 전학오던 날, 마침 그 날은 등교한 새 기숙사 학교에 체력장이 있는 날입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낯선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지만 B는 서먹하기만 합니다. 조금 오래도록......외로움도 느낍니다.
체력장이 끝난 저녁, 수고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영화(비디오)를 보여준다 합니다. 당시 선생님들이 선택한 영화는 '편지'. 불치병에 걸린 박신양과 최진실의 눈물 어린 비극 러브스토리죠. 불 꺼진 어둑한 교실, B는 짝 없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슬픈 영화를 외로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영화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크라이막스 즈음에 달했을 무렵, 문득 B는 품안에 넣어 둔 사진이 떠오릅니다. 정확히는, 사진의 뒷면이 떠오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꺼낸 사진 뒤에는 그가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짤막한 편지가 적혀 있습니다. '전학가서 서운하네. 한동안 보지 못하겠구나. 잘 지내고, 나 사실 네 친구 C랑 사귀기로 했어. 미안해-'라는 내용입니다.
이른 새벽, 아는 이 하나 없는 학교로 전학가는 공허하고 쓸쓸한 마음이 사진 한장에 환해졌던 자신을 멍청하다 생각하며, '왜 사진을 뒤집어 볼 생각을 못했을까.' 라고 자책도 해봅니다. 그리고 홀로 구석에 앉은 B는 눈물을 흘립니다. 마침 영화 속 주인공도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 B는 과거 제 친구입니다. 그는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저는 그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게 해 준 이야기들은 토씨 한두마디 제외하고는 거의 다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목소리와 말투까지도 말이죠.
제가 고된 기숙사 생활에 힘겨워 할 고2 즈음 그와 같은 서클을 하게 되며 친해졌고, 그는 무려 4시간의 전화통화를 통한 위로와 격려로 제게 큰 힘을 줬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그때 그에게 들었던 스토리 중 하나구요.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남학생의 '평범한' 짝사랑 이야기지만, 12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전 그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의 아픈 가정사와 사랑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친구 하나 없는 서먹하고 적막한 전학 첫 날 교실 맨 뒷자리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며 눈물 지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슬퍼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인듯 합니다.
봄은 그가 전학을 온 날이고, 여름은 그가 운동장에서 비행기를 보며 신나하던, 제게 가장 인상깊게 남은 그의 모습을 본 날이고, 가을은 그가 제게 이야기를 들려준 날이고, 겨울은 그가 제게 유일하게 추천한 곡인 'November Rain'(Guns N' Roses) 의 배경이 되는 날입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5월 봄이지만,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을의 쓸쓸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마음 한 구석이 박하사탕을 삼킨 듯 알싸하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은 제가 유일하게 보관하던 그의 뒷모습입니다. 2004년 '몰래 훔쳐 온' 사진이니, 지금은 많이 변했겠죠. 물어물어 들으니,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본다 한들 옛 기억으로 서로를 보기에는 우린 너무나 많은 세상을 지나 왔습니다.
그래도 좁디 좁은 서울에서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다면, 말하고 싶습니다. 12년 전, 넌 기억 못할지도 모르는 작은 도움으로 다행히 잘 버티었다고. 풋풋한 청춘의 기억 하나 남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입니다.
추신, 그저 어린 시절 고마운 친구와의 기억일 뿐입니다. 남다른 감정을 개입한 오해는 말아주시길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무단으로 사진 썼다고 항의메일이나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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